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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 LA폭동 30주년을 생각한다

1965년 8월 11~16일 사우스LA의 남쪽 끝자락 와츠 지역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경찰이 음주운전으로 의심되는 흑인 운전자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촉발된 시위로 34명이 사망하고 건물 600여 채가 약탈과 방화로 파괴됐다. 당시 피해자는 상당수 유대계였고 재산 피해가 현재 가치로 3억2200만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지만, 그 원인으로 흑인과 유대계의 인종갈등이 지목되지 않았다.     약 30년 뒤인 1992년 4월 29일~5월 4일 LA폭동이 발생했다. 경찰은 추격전 끝에 흑인 운전자 로드니 킹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60회 이상 구타했지만 4명 모두 무죄 평결을 받았다. 무죄 소식과 함께 사우스센트럴에서 시작된 폭동은 한인타운까지 확산하며 한인 업소만 2300여 곳이 불타거나 약탈을 당했고 초기부터 원인으로 한흑 인종갈등이 규정됐다.     두 폭동 모두 근본적인 원인은 흑인을 향한 경제·사회·사법의 구조적 소외나 차별의 누적이었다. 많은 전문가들은 와츠폭동의 근본 원인으로 수십년간 누적된 차별을 지목한다. 1940~1965년 주로 남부 출신이 이주해 오면서 LA카운티 흑인 인구는 7만5000명에서 65만 명으로 급증했지만 이중 60%가 정부 보조를 받을 정도로 소외됐다. 당시 LA경찰국(LAPD) 윌리엄 파커 국장은 시위대를 “동물원의 원숭이”라고 불러 폭동에 기름을 부었다.   LA폭동의 근본 원인도 흑인(혹은 라티노를 포함한)의 경제적, 사회적 소외다. 여기에 LAPD의 ‘망치작전’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LAPD는 1984년 LA올림픽을 앞두고 갱단을 소탕하는 망치작전을 펼쳤는데 지역적으로는 사우스센트럴과 이스트LA에 집중됐다. 망치작전은 사실상 1990년까지 계속돼 5만 명 이상이 체포됐지만 대부분 기소도 되지 않았다. 이 기간 젊은 흑인 남녀의 체포 건수는 와츠폭동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로드니 킹 과잉진압 경찰 무죄 평결은 오랜 기간 누적된 경찰에 대한 불신을 폭발시켰다.   폭발은 작은 불꽃이 퉁겨질 때 일어난다. 하지만 오랜 기간 누출돼 방을 가득 채운 가스를 탓하지 않고 작은 불꽃 하나를 탓한 것, 그것이 LA폭동 당시의 시각이었다.   1990년대. 인구가 급증한 한인은 다른 소수계와 접촉면이 늘어났다. 갈등 가능성도 당연히 높아졌을 것이다. 급증한 한인 업소 중에 흑인 고객과 갈등이나 충돌을 빚은 곳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폭동이 발생하자 흑인 고객이 자발적으로 지켜준 한인 업소도 적지 않다. 한인이라서 갈등이 생긴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폭동의 휘발성이 높은 상황에 한인이 있었다.   지난달 29일은 LA폭동 30돌이다. 30돌 행사가 한인 커뮤니티의 역량과 소망을 모두 담은 입체적인 모양새를 갖추지 못하고 산발적이라는 아쉬움은 있다. 그러나 그럴만하다는 수긍도 간다. 그동안 쌓아온 정치력과 경제적 성장, 네트워크가 작동한다는 자신감의 발로일 수도 있다. 한인타운은 이미 경제적으로 여러 인종이 이익을 공유하고 있어 폭동을 방치해도 되는 수준을 넘어섰다. 문화적으로는 독특한 색깔을 가진 매력적인 지역으로 변모했다.     폭동의 역사를 기록한 박물관이 세워지지 않은 점은 더 아쉽지만 박물관 추진의 모멘텀이 약해진 것 또한 현실이다. 어쩌면 소프트파워로도 충분히 참극을 막을 역량이 된다고 안도했을까. 폭동을 기억하는 2세 위주의 할리우드 한인들이 30돌 행사를 여는 것을 보며 우리의 기억이 결국 박물관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학생 때 폭동을 봤던 한인 배우 존 조가 폭동을 소재로 출간한 소설 ‘트러블메이커’도 개인이 세우는 저마다의 박물관일 것이다. 그래도 아쉬움은 남아서, 비난을 받더라도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한인회가 나섰더라면 박물관이 지어졌을까 딴생각을 한다.   그래도 두 가지는 성난 얼굴로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하나는 LAPD가 마치 흑인의 분노가 소진될 때를 기다리듯 폭동을 방치하다 끝내 관할지역을 포기하고 경계선 끝에 가 베벌리힐스를 지킨 것. 또 하나는 주류 언론이 폭동 초기부터 로드니 킹이 구타당하는 장면과 거의 폭동 1년 전에 일어난, 한인 업주가 흑인 10대에 총격을 가한 사건을 계속 언급해 피해자 흑인-가해자 한인 이미지를 연결했다는 점이다. 안유회 / 사회부장·국장프리즘 la폭동 생각 la폭동 당시 한인 업소 폭동 모두

2022-05-01

배스 의원, LA폭동 때 "리커 방화는 기적" 발언

내년 LA폭동 30주년을 앞두고 LA 시장 선거에 나선 캐런 배스(민주·68) 후보가 1992년 LA폭동 당시 리커스토어 방화범들을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했던 사실이 밝혀져  물의를 빚고 있다. 배스(가주 37지구) 연방하원 의원은 남가주의 대표적인 흑인 여성 정치인이다.     지난 1992년 11월 29일자 뉴욕타임스(NYT) 기사에 따르면 배스 의원은  흑인 폭도들의 리커스토어 방화를 “기적(miracle)”이라고 표현했다. 당시 흑인 폭도들에 피해를 입은  리커스토어 대부분은 한인 소유였다.      그런가 하면 배스 의원은 폭동 1년 전인 1991년부터 흑인 거주 지역의 한인 리커스토어 폐업을 위한 활동에 관여했던 정황도 나타났다. 당시 이런 조직적 활동으로 인해 한인 소유 리커스토어 150개 이상이 문을 닫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 매체 데일리콜러의 2020년 8월 보도에 따르면 배스 의원이 창립한 비영리단체 ‘커뮤니티 코얼리션(Community Coalition: 커뮤니티 연합)’ 2011년 보고서에서 배스 의원은 폭동 하루 전 톰 브래들리 LA 시장과 만나 사우스LA 리커스토어 영구 폐쇄 방안도 논의했다.     배스 의원은 NYT 기사에서 “사우스센트럴에 있는 리커스토어들은 흑인 저소득층 커뮤니티에 악영향을 주고 있다”고도 비판했다. 이어 “폭동이 일어나기 전 리커스토어 숫자 축소 방법을 위한 미팅이 있었다”면서 “그런데 우리가 문을 닫게 하고 싶었던 리커스토어는 며칠 뒤 기적처럼 잿더미가 됐다”고 말했다. 배스 의원은 “그런 방식으로 리커스토어 셧다운을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우리가 수십 년 동안 그토록 원하던 리커스토어 폐업을 며칠 만에 이뤄냈다”고도 했다.     배스 의원은 폭동 원인을 업주들 탓으로 돌렸다. 1992년 6월 2일자 LA타임스 기고문에서는 “리커스토어가 폭동을 유발했다(fuel the rage)”며 “주류 판매는 도박, 강도, 마약, 폭력 등의 문제를 야기한다. 우리는 리커스토어 주변 환경도 신경 써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 단체가 그들 비즈니스의 파산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면서도 “하지만 LA 폭동을 유발한 업소의 재오픈은 비극이 될 것”이라며 영업 재개를 완강히 반대했다.     같은 해 11월 16일 AP통신과 인터뷰에서도 배스 의원은 “사람들이 업소들을 방화한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업소 소유주들에 대한 불만이 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에 앞선 7월에는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과 인터뷰에서 “커뮤니티에 문제를 야기한 업소들이 다시 영업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실제로 배스 의원은 한인 업주들의 비즈니스 재오픈에 반대하는 청원운동을 이끌었다고 데일리콜러가 보도했다.     과거 발언과 관련해 배스 후보는 본지에 “내용이 와전된 것이다. 1992년 소요는 모든 이에게 비극이었다. 30년 전 했던 인터뷰 내용은 현재 나와 커뮤니티 간의 관계를 대변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한편, 이런 소식이 알려지자 한인사회 각계에서는 충격적이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제임스 안 LA한인회장은 “발언이 모두 사실이라면 실망을 금할 수 없다”고 말했고 강일한 LA한인상공회의소 회장도 “시장 후보가 그렇게 말한 게 정말인가? 실망스럽다”는 입장을 밝혔다.   원용석 기자la폭동 배스 내년 la폭동 la폭동 당시 캐런 배스

2021-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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